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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끝에 존재하는 것

캬뮤x파르바네(현님의 드림주)

돌고 도는 시간. 그리움은 눈처럼 쌓여 이윽고 심장을 얼려버린다. 저주와도 같은 사랑은 가장 찬란한 시간을 멈추게 하고 결코 끊을 수 없는 거미줄이 되어 남자를 얽매어 버린다.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시간 속에 그대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불멸자의 연인이여


나는 죽을 것이다.


남자는 답했다. 겨울하늘과 같이 비어버린 푸른 눈동자를 하고.






***






" 재미있는 이야기로구만"


빙글거리는 웃음이 남자의 앞에 서있는 이의 입술에 걸린다. 마치 방금 본 tv프로그램의 이야기를 들은 것 마냥 가볍게 장단을 맞추어주는 행동이 무색하게 이야기를 들려준 남자의 얼굴은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냉랭함조차 아름다운 장신구로 보여질 정도로 웃지 않는 남자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한낱 흥밋거리로 치부하는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운 선을 그리는 금색의 눈썹이 미세하게 흐트러지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얼굴에 떠올랐던 불쾌감은 아름다운 얼굴 속으로 들어가 햇살에 녹는 눈처럼 사라졌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빙글거리는 웃음이 짙어졌다.-아아 너무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듣고 있으니까


들려온 말에 남자의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네놈이 듣던 말든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투정 부리던 아이를 보는 어머니 마냥 이번에는 빙글거리는 웃음이 소리를 덧입어 튀어 나왔다. -하하하 난 신경써주고 싶은데. 미인이 인상 쓰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거든.


자신의 말을 입증하듯 웃음을 내던 이는 남자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을 사과하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입가의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정말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인 모습은 정중했고 진심으로 보였다. 숙인 머리위로 오렌지색의 조명이 괜찮다는 듯 내려앉자 금색의 머리칼은 쓰다듬은 조명의 색을 머금어 붉은색으로 변하였다.


아까의 무례와 전혀 다른, 손바닥을 뒤집듯 바뀐 모습에 경계의 날을 세울 만도 했지만 이미 그런 것을 따질 신경 따위는 남자에게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왜냐하면-


“ 또 불멸자의 신경을 건들이고도 무사할 것 같지 않으니 말이야”


남자는 불멸자였으니까. 죽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떠돌아다닐 것이었다. 결코 빠져나오지 못할 시간의 감옥에 갇혀서. 그 감옥 속으로 밀어놓은 것은 연인이었다. 그를 가장 사랑한.


단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잔혹한 현실을 일깨워준 음성에 남자는 가라앉은 눈을 들어 아래로 내려간 금색의 머리칼을 자신의 푸른 얼음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을 바라본 시선이 느껴졌는지 내려간 금색의 실들이 붉은 잔상을 흘리며 경쾌하게 올라왔다. 싱긋-잔인한 말의 내용물과 다르게 상큼하다는 단어 외에는 어울릴 것이 없는 미소가 들어 올린 고개 속에 자리 잡아 남자를 맞이했다. 눈과 마주치자 내뱉은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무섭다는 듯이 과장된 몸짓으로 크게 한번 부르르-몸을 떨었다. 광대와 같은 익살스러운 몸짓이었지만 남자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고 고요했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 네놈도 마찬가지지 않은가”


겨울바람과 같은 음성은 나지막하게 자신의 앞에서 평범함을 연기하는 존재의 처지를 일깨워 주었다 . 남자의 말에 웃음은 그쳤지만 부드럽게 휘어진 눈가는 풀어지지 않고 그대로 멈추고 남자를 응시했다.


“ 세계의 사랑을 받은 이와는 처지가 다르지. 기껏해야 되다만 흡혈귀라고.”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고는 자신의 말이 웃겼는지 아까의 웃음을 다시 지어 보인다. 분명 영원히 죽지 못한다는 공통점 외에는 교착된 면은 없는 존재였다. 남자의 눈앞에 있는 이는. 남자는 적어도 인간이었고 그의 앞에서 웃고 있는 이는 피를 먹는 존재- 흡혈귀라는 생물이었다. 그것도 온전하지 않으며 점차 어둠으로 변해가는 인간도 흡혈귀도 아닌 존재. 어둠이 아닌 황혼을 걷는 자였다. 농과 같은 그 말처럼 처지도 상황도 전혀 달랐다. 같은 불멸자의 삶이지만 남자는 세계를 구한 이의 연인이었고 모든 것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으니까.


웃음을 지어준 이는 목이 마른지 자신이 시킨 술이 담긴 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유리잔에 담긴 선홍빛의 액체가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이런 날에는 목이 마르거든


글라스를 바라보던 눈동자에 잠시 핏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곧 웃음을 덮씌운 눈꺼풀 속으로 자신의 눈동자를 숨긴 후 조심스럽게 잔을 입술 쪽으로 기울였다. 아직은 인간의 흉내라도 내고 싶은 듯 입안에서 한번 머금고 향을 음미하는 듯 가만히 멈추었다. 아마 본인이 말했던 직업 탓일 듯. 저 웃기지도 않은 존재는 자신이 요리사라고 했다. 미각이 죽어 분명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할 거면서.


진기한 요리 재료를 찾아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고 자신을 소개한 저이는 관심 없어 하는 남자의 반응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많은 것을 주절거렸다. 어디의 야채는 색이 좋지만 향은 별로이며 고기를 재울 땐 로즈마리보단 바질이 입맛을 북돋아준다는 등 남자가 정말 관심 없어 하는 주제들을 떠벌 떠벌 늘어놓았다. 요리 강습과 같은 애기를 들려주다 어딘가의 무언가가 맛있어서 찾아가 보았다-란 경험도 뜨문 뜨문 지나가듯 흘렸다 물론 그 어딘가가 공간이 아닌 차원이라는 것이 평범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은 흡혈귀라고 남자에게 말했다. 정확하게는 진행 중이라고.


마지막 말이 중요한 듯 강조하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된 모습은 사뭇 진지해지만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런 모습에도 남자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내보여 주지 않았으며 또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입술에 올린 손가락에 붙은 웃음은 여전했었다. 신경이라는 것이 아주 잠깐 거슬릴 정도로.


남자가 잠깐 상념에 잠긴 동안 글라스를 들은 손이 빙그르르-돌려졌다. 바의 조명을 머금은 붉은 액체가 투명한 유리 안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 좋은 술을 마실 때에는 먼저 향을 즐긴다. 가라앉은 향을 끌어올리기 위해 먼저 잔을 흔들고 그 후 올라온 향을 맡으며 코로 술을 즐긴 후 마지막으로 입안에 넣어 술의 참맛을 즐긴다 ―남자가 알고 있는 예법이었다. 그것을 흉내 내는 모양이었다. 허나 이미 입안에 넣은 후는 늦어도 한참 늦었을 뿐만 아니라 순서에도 맞지 않았다.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를 한다고 남자는 냉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것 역시 딱딱하게 얼어붙은 얼굴 표면 위로 뚫고 나오지 못했다. 단지 비웃는 것을 알려주듯 시린 푸른 눈동자로 응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남자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술을 머금은 입술은 멈추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은 인간이라고 스스로에게 자각시키는 것 같았다. 마치 의식을 치루 듯 천천히 입안에 담긴 액체를 조심스럽게 목구멍으로 넘기었다. 꼴깍-넘어가는 물소리가 들리고 파르르-무겁게 내려앉은 긴 금색의 속눈썹이 떨렸다. 괴로운 듯 잠시 숨을 고르던 탓에 찡그러졌던 미간이 다시 매끄러운 모습을 찾자 핏빛이 감돌던 눈동자는 다시 약간은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으로 돌아왔다.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어 들이마시고 싶은 욕망을 잘도 참는다며 남자는 손에 들리어진 유리잔을 바라보았다


시킨 것은 칵테일이었다. 블러드 메리. 여왕의 이름을 딴 술. 아름다운 여왕이었지만 피처럼 잔혹함을 가진 군림했던 여인. 피어나는 장미와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장미의 색과 같은 붉은 피로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리고 자신의 최후마저 피투성이였던 여제. 연약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 어떤 사형집행인 보다 더 잔혹했던 여왕이었던 살해자. 그녀의 말에 영국은 공포에 떨었었다. 오늘은 어떤 이가 타오를까. 마켓플레이스에 장작불이 꺼질 날은 언제일까. 모두 숨을 죽여 떨고 있을 동안 여왕은 외쳤었다. 좀 더 좀 더 더 타올라라-!! 나의 위대한 소망을 위해!!!


남자가 사랑한 이와 닮아 있었다. 피투성이 여인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나라를 공포에 빠뜨리고 선혈을 흘렸다. 세계를 구원한 아름다운 소녀는 연인이 살아있기를 원하여 남자에게 불멸의 삶을 주었다. 모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서글프고 허망한 이야기였다. 피투성이 여제와 세계를 구원한 아름다운 소녀. 둘 다 마지막은 연인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결말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스스럼없이 사람을 죽였던 아름다운 여왕. 그가 살기 원한다는 이유로 사라져버린 잔혹한 연인. 그 둘의 공통점은 모두 욕망에 따랐다는 것이었다.


그 욕망의 술을 욕망을 참기 위하여 마시고 있었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가.


이름을 딴 이와 같이 유리잔에 담겨 있는 액체는 붉었다. 피와 같은 색깔. 단지 어쩌면 저 존재에게는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생명을 죽여 만들었다는 결과는 같았으니까. 단지 인간이 재료가 아니다-란 것이었다.


저렇게라도 욕망을 달래는 모습은 우스워보였다. 아무리 술로 끓어오르는 갈증을 달랜다고 해도 흡혈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부질없는 몸부림인 것이다. 그것은 죽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자신과도 닮아 있었다.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는 삶. 어쩌면 욕망의 이름을 딴 술을 마시며 억지로 굴레를 지워버린 욕망에 찬 인간들을 비웃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의 생각을 안듯 술잔을 기울려 술을 홀짝이던 이에게서 멋쩍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아 단지 피 같아서 시킨 거라고. 그런 것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시게나.


진행 중이라고 해도 흡혈귀라는 것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술을 마시며 멋쩍게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밤이 되면 욕구가 강해지니까


설명해 주듯 창밖의 달쪽으로 흘깃 눈을 옮기었다. 어그러진 모양의 달이 회색의 구름에 쌓여 하늘에 겨우 박혀있었다.


오늘 보름이 아니길 다행이지-마치 안심시키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남자가 묻지 않은 것들을 알려주는 것처럼 말했다. 주절거리는 말들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놓은 남자에 대한 배려 같아 보였다. 사실 남자에게는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지만 저 점차 과물로 변해간다고 하는 이에게는 신경 쓰이는 일인 것 같았다.


타인을 잘 믿는 성격인 것인지 아님,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알려지면 약점이 될 수 있는 정보들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어리석음. 어쩌면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오만함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지만 눈앞에서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며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바로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오만함보단 한심함이었다. 무방비의 허점투성이. 당장이라도 마음을 먹는다면 일곱 살 난 어린이이도 죽일 수 있을 만큼 웃고 있는 모습에는 무방비였다. 단지 타인에 대한 호의만이 가득한 어리석은 웃음만을 짓고 있었다. 평범하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 아닌 자는.


“남을 믿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


남자의 생각을 안 듯 제법 맵시 있게 생긴 손가락으로 들린 유리잔의 끝을 매만졌다. 상냥하게. 아이를 얼래듯 만지는 손길은 다정하고 고았다.


잘도 그런 말을 내뱉는다며 남자는 드러나게 눈살을 찌푸렸다. 믿는다는 말을 저리 쉽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바보이거나 멍청이.


그런 남자의 생각과 다르게 여전히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분 좋은 고양이가 골골거리듯 느긋한 웃음은 깊어졌다.


묘하게 신경을 긁는 재주가 있다며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동자에 이번에는 혐오감이 아주 잠시 스쳐지나갔다. 남자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의 웃음은 정말이지 기분이 나쁠 정도로 역겨웠다.


본래의 자신이라면 조롱과 함께 비웃음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여주기에는 상대방은 너무나 엉뚱했고 그럴 가치조차 없는 존재였다. 아니 본래의 자신이라면 상종조차 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저런 허울 좋은 감정적인 말을 늘어놓는 인간치곤 제대로 된 녀석들을 보지 못했으니까.


다만 기분이 조금 나빴을 뿐이다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남자에게로 돌려졌다. 다정하게 휘어진 눈매 속에 이질적인 보라색 눈동자가 바의 네온사인을 받아 반짝였다. 남자의 세계에서는 평범한 쪽에 속하는 색이었지만 눈앞에 서있는 그 존재의 색은 분명 이질적이었다. 단지 색이 아닌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이질감. 자신과 같은 부류였다. 섞이지 못하는 홀로 떠돌아다니는 다른 세계의 것.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지 않을 방랑자.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우연한 만남이었다. 평범한 사람처럼 거리를 걷고 평범하게 들려온 질문에 대답하며 해가 지면 여전히 찾아오는 반복되는 밤이 되자 평범한 이들이 하는 것처럼 고독을 잊기 위해 바에 들어왔다. 그리고 만난 것은 평범하지 않은 존재였다.


유난하다 못해 지나친 존재감을 지우기 위해 평범함을 연기하던 남자의 곁에 누군가 앉았고 말을 걸었다. 돌려진 눈동자 속에 들어온 것은 어둠을 맞이하는 황혼의 경계에 선 보라색. 그리고 -


- 조금 시끄러워서 말이야. Bonsoir, monsieur. 좋은 밤입니다-


웃음이었다.


비어 있는 눈동자에 인사를 건넨 이의 웃음이 가득 채워졌지만 남자는 단지 바라본다는 행위만을 할뿐 건네 온 인사를 침묵으로 무시했고 그런 그의 모습이 익숙한 듯 가볍게 몸을 옆자리에 붙였다. 기나긴 이야기를 예상한 것처럼 경쾌한 웃음으로 술을 시키고 간략했다고 주장한 길고 긴 본인의 소개를 마친 후 그의 침묵에 동조하듯 조용히 기다렸다. 마치 그가 말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남자는 입을 열었다.


많은 것을 이야기 했다. 얼어붙은 표정 속에 흘러나오는 말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고 흘러가는 시간이 인간의 언어가 되어 나오는 과정을 그 존재는 조용히 들어 주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단지 자신에게는 대화를 나눌 상대가 아닌 들어주는 이가 필요했으니까. 말을 나누는 상대는 남자에게는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말은 마음을 담았기에 대화를 한다는 것은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남자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만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치 그런 그의 마음을 알 듯 보라색의 눈동자는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어 주었고 단 한마디의 말조차도 하지 않은 채 온전히 말을 담아주었다. 눈송이가 내리듯 언어는 기억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갔고 절대의 시간 속의 기억의 홍수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듣는 역할을 해내었다. 분명 인간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보라색의 눈동자는 이야기를 하는 남자를 놓치지 않았다. 아이를 보듯 다정하게 시선으로 감싸 웃음으로 남자를 붙들어 주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풍경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의 모습을 한 이도 스쳐가는 풍경 중 하나일 뿐이라고. 눈을 감고 다시 뜨면 사라질 허망한 꿈이라고. 그것이 불멸자의 삶이였다. 멈추어진 자신 뒤로 모든 것이 흘러가는 삶. 그것을 그녀는 겪었고 그 허무함을 남자는 채워주지 못했다. 단지 자신도 흘러가는 풍경 중의 하나로 변해 갈까봐 두려워 할뿐이었다. 허나 그 두려움조차도 이제는 남아있지 않았다. 풍경이었던 자신은 이제 시간 속에 고정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열어버린 입술은 닫히지 않았다. 막혀있던 담을 허물어버린 다가옴은 남자의 모든 것을 꺼내었다. 마지막 기억이 음절로 떨어지자 더 이상의 꺼낼 말이 없는 입술은 자신의 할 일을 마치고 다물었다.


- 재미있는 이야기로군만 -


그리고 그런 반응이라니-


반응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 것을 들어줄 이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반응이 와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고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를 놀리듯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던 존재가 꺼낸 반응은 평범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놀림에 가까웠다. 마치 허물없이 농을 주고받는 친구같이.


평범한 이를 대하는 듯 심드렁한 태도에 무시당했다는 불쾌감이 남자의 감정에 스며들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렸지만 카뮤라는 인간이 가진 성향마저도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말 어이없게도 불멸자가 되기 전 인간일 때의 반응이 튀어 나왔다. 인간으로 대해주는 저 존재의 반응에. 그리고 인간다운 반응에 기쁜 듯 웃었다 . 마치 그 웃음이 위로와도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어이없게도.


“아아 미인이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러운데. 이런 늙은이도 달아오른다고.”


떠오른 자신의 생각에 어이없어 하며 보는 것을 그만 두지 않은 남자에게 유쾌한, 허나 결코 달갑지 않은 음성이 달라붙었다. 여성이라도 그다지 반갑지 않은 말이 자신과 같은 남성의 외형을 한 이에게 듣는 것은 듣고 싶지 않을 뿐더러 결코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물론 남자도 반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농담을 수 없이 들었지만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끔직했다


바라보던 시선이 노려보는 시선으로 변하자 부끄러워 시선을 견디지 못해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숨기는 것처럼 손을 올려 얼굴을 감쌌다. 물론 벌려진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웃음은 여전했지만.


자신을 놀린다는 것을 안 남자는 불멸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타인을 비 아니 눈이 오는 날 먼지가 휘날리도록 패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허나 단지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다는 행위를 하기에는 남자의 자존심은 너무 곧았고 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대한 적의가 없었다.


물론 싸운다면 쓰러지는 것은 상대방이었다. 고운 얼굴과 달리 여왕의 검이라 불리던 이였다. 누군가를 지키는 역할이었기에 그에 걸맞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런 웃기지도 않은 농을 떠는 저치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런 일 따위로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일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가치조차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어차피 이 밤이 지나면 볼일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지나가는 바람과 같이 계속되는 자신의 인생에서 기억도 되지 못하는 먼지. 영원의 삶속에 기억되는 것은 없다. 소중한 것도 괴로운 것도 감정을 느낄 정도로 강하게 인식되는 일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허무. 슬픔도 아픔도 결국은 세월에 퇴색이 되어 먼지로 사라진다. 이것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것 역시 모두 소용없는 것이다.


남자는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상대방은 -


" 혹시 이런 늙은이에게 맘이 있는 거야? 그건 곤란한데"


그러면 큰일인데-정말 그렇다고 믿는 것인지 웃던 얼굴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변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곤란한 심정을 대변하듯 글라스를 집었던 손이 대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휙 아래로 내려간 고개가 올려지고- 아아 내 착각이구만. - 환하게 웃었다


순간적으로 찔러온 농에 황당함을 느끼며 남자는 황급히 나오는 욕지거리를 막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모르게 저 존재에게 자신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놀림거리가 되는 것을 그리 유쾌한 감정은 아니었다. 단지 놀림거리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라며 변명 같은 생각을 끄집어 놓은 남자는 가만히 웃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전혀 약은 올릴 생각은 없다는 듯 사람 좋아 보이는 나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색이 가득한 농이었지만 가만히 미소를 띄우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귀여운 아이를 보고 예뻐하고 싶다는 그런 감정 쪽에 더 가까웠다.


저 존재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일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가면과 같이 입가에 빙글거리며 붙어있는 웃음은 어찌 보면 놀리는 것과 같았지만 본질은 다정함이었다. 비워버린 자신과 다르게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황혼을 걷는 존재의 눈동자는.


저물어 가는 황혼 속에 다물어진 입술을 깨문 채 멀뚱히 서있는 청년이 보였다. 눈동자 속의 자신은 당혹감이란 감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남자는 지금 자신이 당황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아직도 자신이 감정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놀람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에 의아해했다. 이미 그런 것 따위는 그녀가 사라졌을 때 함께 부셔졌다. 단지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껍데기뿐이었다. 죽기 위한 목적을 위해 그녀와 함께 있던 자신의 반응을 흉내 내고 있는 것뿐이었다.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경험으로 축적된 감정을 내보여주고 먹고 자고 움직였다. 죽기 위해. 죽기 위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이율배반적인 행위.


웃기는 일이라고-예전의 자신이라면 비웃었을 것이다. 죽기 위해 사는 것도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리고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닌 영원의 생을 사는 공통점이 있다는 이유로 대화 상대를 택한 일도 자신답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어울리는지 모른다. 이미 지금 자신은 카뮤답지 않았으니까. 카뮤란 외향을 뒤집어 쓴 불멸자일 뿐이었다.


- 당신이 살아있다면, 그것의 대가가 나라면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어요 -


- 크리스자드 살아있어 줘요. -


어째서였을까. 세계를 위해 희생한 가엾은 연인, 그리고 세계에게 가장 다정한 선택을 한 소녀는 연인은 남자에게는 가장 잔혹한 선택을 하였다. 불멸자, 영원의 삶을 사는 사람. 영원히 죽지 않는 죽지 못하는 삶. 자신의 짊어진 멍에를 남자에게 마지막 순간에 짊어주었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그러니 살아달라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홀로 살아간다는 것을. 소녀가 떠나고 홀로 존재하는 고독을, 그리고 고독보다도 더 지독한 그리움이 남자를 좀먹어 갈 것이라는 것을. 모든 것을 알았고 모든 것을 기억했던 소녀는 남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벌을 내렸다.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알 수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소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소녀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남자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소녀의 형벌이 지속되는 이 순간조차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살아달라고 한 것일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녀가 만든 영원의 미로 속에서 사라진 열쇠구멍만이 존재한 유언을 간직한 채 남자는 헤메었다. 돌고 돌고 또 돌고 계속되는 시간의 바늘속의 태엽이 되어 무력함에 박제되었다. 그래도 그 의문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당신은 살아달라고 한 것인가-


그리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의문은 남자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들이쉬는 숨과 함께 의문이 들어오고 나가는 숨과 함께 그 비어버린 자리를 의문이 채워졌다. 푸른 눈동자로 상대를 보고 입술을 열고 혀를 움직여 말을 하여도 결코 그것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연인이 새긴 각인. 그것은 영원히 남자를 따라다닐 것이었다.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세계가 멸망한다면 자신을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소녀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단지 그녀가 살린 세계란 이유만으로 세계의 멸망 따위를 바라지 못했다. 슬프게도. 그녀가 남기었다는 흔적이었기에 남자는 세계에서의 죽음을 포기했다. 가엽게도.


그래서 떠났다. 소녀가 남긴 세계를. 죽기 위하여. 그녀가 남긴 세계에서는 죽을 수 없었으니까. 그것이 연인의 유언을 지킬 수 있는 남자의 마지막 배려였다. 소녀는 남자가 살아있기를 원했으니.


소녀는 말했다. 살아달라고. 살아 아름다운 그 눈동자로 세계를 보고 보여진 아름다움을 기억해 달라고.


그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영원히-


자그마한 입술이 열렸다. 남자가 가장 좋아하던 미소를 입가에 올리고 마지막의 음성을 내어놓아 꺼져가는 삶의 마지막을 오직 그를 위해 읊조렸다.-가엾은 카뮤. 그래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겠지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눈송이처럼 마지막 숨결은 달콤한 저주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숨결이 보석과 같아서 남자는 슬픔보단 아름답다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슬픔조차 잊게 만드는 아름다움. 처절하게 그녀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남자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남자가 인간으로써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결코 잊혀지지 않는 찬란함이 그대로 떠오른다. 단 하나의 놓침도 없이.


연인의 숨이 끊어지자 세계는 환희로 들끓어 오른다. 모든 것들이 웃고 부서지던 세계는 수복된다, 조각나던 대지는 다시 푸른 싹을 돋우고 메마르던 우물은 다시 젖을 내어놓는다. 다시 돌아온 삶에 살아있는 것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단지 자신만이 사라져버린 연인을 안았던 비어있는 손만을 내민 채 바보같이 서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소리 지른다-아름다운 분! 위대한 분! 당신은 그의 사랑을 받은 자! 기뻐하세요. 기뻐해 당신의 연인의 희생을-


마치 비명과 같은 환호가 그의 주위를 둘러쌓았다. 한명 두명 세명 차곡차곡 모여 벽을 만든다. 웃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안도하는 소리 환희하는 소리- 소리 소리 소리 소리 소리- -그 많은 소리 중에 단 하나도 너의 죽음을 슬퍼하는 소리는 없었다. 나비여. 이 추악한 이들을 살린 너의 목소리는 너무나 다정했는데.


햇살에 반짝이는 보석과 같은 차가움이 남자의 머릿속을 덮쳤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카뮤 크리스자드. 하얗고 하얀 하늘 속 빛들이 부셔져 내리는 사그라질 것 같은 아름다움. 인간의 온도에 녹는 허망의 눈송이. 보석과 같지만 현실이라는 인간에게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신기루의 보석. 자신의 연인. 가냘프면서도 노래 소리와 같은 목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울려 퍼진다- 카뮤 카뮤 살아줘요 살아줘 살아서- 이 아름다운 세계에- 영원토록 존재해줘-


귀를 뜯어내고 싶다는 욕망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허망한 목소리에 취해 모든 이성은 사그라지고 목소리에 파묻혀 질식해 갈뿐이었다. 박제된 나비처럼, 추억에 붙들려 굳어간다. 소녀였던 나비. 나비를 사랑한 청년, 그리고 나비가 되어버린 남자. 사라진 소녀는 자신의 날개를 남자에게 붙여 주었다. 잊히지 않기 위해. 무엇 때문에- 당신은 어째서 이런 형벌을 나에게 주었나. 나는- 나는- 당신이 사랑한 나는, 당신을 사랑한 나를----!!!


추억에 붙들린 눈동자가 도망치는 것조차 포기한 채 겨우 눈을 감는다. 자신은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이었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얼려버린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고통에도 자신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못했으니까.


남자를 응시하던 보라색의 눈동자가 피곤함으로 물들었다. 살짝 얼굴을 찌푸리던 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죽기 위해 사는 것 보단 기다리는 것이 어때?”


툭-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남자의 마음에 질문이 떨어졌다. 떨어진 질문은 얼어버린 마음의 표면을 깨뜨리고 의문이란 파장을 일으켰다. 이번에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은 의문. 물끄러미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다시 한 번 깊게 가라앉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러니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야”


한심하다는 듯 금색의 눈썹이 힘없이 내려갔다. 골치가 아프다는 것을 표현하듯 이번에는 이마를 짚으며 절래-고개를 흔들었다. 과장된 감정의 몸동작. 자신과 전혀 다른 이의 모습에 남자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왜 살아달라고 했을까요?“


유쾌하게 묻는 음성과 달리 빛을 빨아들인 눈동자는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우스꽝스럽게 올려진 팔. 무대 인사를 올리듯 경쾌하게 얇은 손가락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하나의 질문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올려진 손가락은 남자의 주위를 끌기 위해 까닥-흔들렸다. 광대는 재주를 부리고 그 대가로 동전을 받는다. 남자의 눈앞에 있는 황혼을 걷는 이의 질문을 받고 질문을 던진 이는 동전 대신 대답을 요구한다.


" 인간은 태어난답니다. 그리고 죽지요. 그 다음엔?"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경쾌한 목소리. 오직 즐거움과 흥미만이 가득하여 사람들을 꾀어 버린다. 아아 이쪽으로 오시게 이곳은 즐거움만이 가득한 곳. 잠깐의 유희로 당신의 호주머니를 털어버리지. 허나 털리는 그 순간만큼은 아무 걱정도 절망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라네. 광대의 춤을 즐겁게 보시게나.


질문은 절망에 질식해버린 푸른 눈동자를 잡아버린다. 허망함에 지쳐 다가옴에 틈을 보인 아름다운 가엾음을 저물어가는 황혼의 눈동자는 날쌔게 잡아 채어버렸다. 더 이상 울음은 그만. 시끄러우니까


그리고-


Mesdames et messieurs, Le scènce se léve-! (레이디 앤 젠틀맨 무대의 막이 오릅니다-!)


막이 열린다. 재주를 부리기 위한 공도, 불꽃이 넘실되는 굴렁쇠와 그것을 넘기 위한 맹수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대에 황혼을 걷는 자가 올라가고 나비의 날개를 가졌음에도 무게에 추락해버린 가엾은 남자를 위하여 광대의 가면을 쓴다. 빙글거리는 웃음. 입가에 딱붙어 우스꽝스러운 음성을 내어 공연을 시작했다. 자 이제 시작이라네― 시끄러운 소리는 멈추기를. 오직 무대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광대 뿐--!!


단 하나의 관객을 위해 보라색의 광대는 질문을 던진다.


" 그 다음은 어떻게 되지 카뮤?"


이름 따윈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빙글거리는 웃음속의 박힌 보라색은 기묘하고 이상해서 경계와 의문 따윈 날려버린다. 그런 이상함은 중요하지 않다고 남자는 생각해 버렸다. 다만 빨려 들어가듯 던져진 질문만이 귀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런 그를 재미있다는 웃음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벽과 같은 목소리 대신 천을 찢고 떨어지는 동전의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봄은 돌아온답니다."


돌고 또 돌고 헐벗은 이가 사는 곳도 부자가 쾌락에 지쳐 배를 보인 채 햇살을 즐기는 곳도 영원한 겨울만이 지속되는 얼음의 섬에도 봄은 돌아온답니다. 햇빛으로 숫자로 사람들의 인식으로 봄은 다가오지요. 꽃이 시들고 영원한 밤이 시작된다고 해도 봄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봄은 돌아온답니다.


노래하듯 웃던 목소리는 음률을 타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푸른 눈동자에 비추어진 입술은 단지 웃음만을 끼운 채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하지만 상냥하게 노래하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 광대의 것이다.


남자는 대답했다. 겨우 들어온 의문에 대답한 이성이 지금 자신의 귀에 들리는 노래는 현실이 아닌 그의 머릿속에 울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랫소리는 절규와 같은 환호를 잠재운다. 침묵을. 고요하기를. 안식을 그대에게. 너무 시끄러워요 당신은. 당신의 마음은.


" 그렇기에 봄은 아름답지. 희망이니까-"


노래하듯 나긋하게 속삭이던 목소리는 다시 현실의 음성을 덧입는다. 그래 이런 목소리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존재는. 비현실적인 존재이면서 누구보다 현실에 붙잡아 주는 목소리를 지니었다. 그런 주제에 말을 들어주는 것을 택한 다정함. 그리고 -


" 그녀는 당신을 사랑했나?


- 광대의 잔혹함


가라앉은 감정의 호수에 다시 질문이 떨어진다. 이번에는 돌이 아닌 날이 선 칼. 떨어진 칼날에 표면은 찢기고 거칠게 감정을 휘젓는다. 뒤섞여 혼탁한 넘치는 감정 속에 분노가 강하게 치고 나왔다. 비어 있는 푸른 동공에 대비되는 강렬한 분노가 새빨갛게 일렁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남자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절대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남자에게는 결코 흔들릴 수 없는 현실이며 불멸이였다. 타인에게 의심이 되며 광대의 조롱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리석게도 남자는 그 불멸을 입을 열어 털어놓았고 그 틈 속에 비속한 광대는 저속한 언어로 그의 사랑을 조롱한다. 정말 사랑했었나요? 그녀는, 당신을 이런 지옥에 떨어뜨리고~ 가엾은 분. 가엾고 안쓰러운 아름다운 바보이시네요.


웃는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지고 기다린다. 살의가 가득한 푸른 검을 자신의 눈동자에 온전히 받아들인 채 물음에 대한 답을 기다린다. 사랑했었나 그녀는 당신을.


숨이 몰아쉬어졌다. 분노가 소름과 같이 온 몸을 흔들고 지나갔다. 쭈삣-털이 곤두서고 당장이라도 손을 들고 웃고 있는 얼굴가죽을 뜯어버리고 싶다는 살의가 남자의 육체를 충동질했다. - 당장 손을 들어라.카뮤. 그녀를, 너의 사랑을 모욕한 저 흉물스러운 괴물에게 당장 분노의 검을 내려라.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저것을 죽여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아.


아름다운 눈송이가 내린다. 다시 끓어오르는 분노에 데워진 호수의 표면을 살랑거리는 추억의 온도가 차갑게 식혀버린다. 녹아내리는 눈송이. 광활한 하늘에 뿌려지는 눈의 보석. 아름다움은 허망하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불멸자였던 소녀도 인간이었던 청년도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은 허무한 불멸의 생.


분노하고 감정을 토해내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런 감정조차 쓸모없는 것이다 .불멸자에게는.


자신은 죽지 못한다.


- 그녀를 만날 수 없어 -


".......사랑했다..."


떨리는 입술을 뚫고 나온 목소리에 희미하게 열기가 남아 있어 남자가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노가 남긴 흔적일 뿐, 남자의 눈동자는 다시 감정을 가라앉힌 채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유일하게 색이 있는 푸른 눈동자가 눈꺼풀 속으로 사라지자 남은 것은 눈처럼 하얀 피부뿐이었다.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키는 그 모습이 마치 눈 속에 누워 얼어버린 시체와 같다고 생각했다. 가엾은 아이. 추억은 그를 좀 먹어간다. 인간이었기에 감당하지 못할 굴레를 뒤집어쓰고 그것이 연인의 것이라는 이유로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는 눈의 아이.


끓어오른 감정조차도 꺼지게 만들 정도로 남자는 지쳐있었다. 죽기 위한 소망만이 겨우 남자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감정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외치고 있었으면서.


남자와 함께 광대의 눈꺼풀도 감긴다. 고요했다. 노래는 그치었고 시끄럽게 외치던 광대의 웃음도 분노하던 청년의 외침도 그 모든 소리가 멈춘 채 그들은 침묵을 지키었다. 원하던 침묵이었다.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 속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소리는 시끄러워서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의문과 깨닫지 못한 의문. 오선지의 악보처럼 남자의 삶에 물음표만이 찍혀 그의 삶을 연주했다. 불협화음의 음악은 너무나 시끄러워서 차마 지나치지 못했다. 광대는.


그래서 -


감긴 눈 사이로 환영과 같은 빛이 일렁거렸다. 마지막으로 본 빛의 색은 오렌지 빛이었다. 어둠속에서 춤을 추듯 얇게 퍼지는 모습은 어찌 보면 차가운 얼음의 땅에서만 볼 수 있다는 오로라와 닮아 있었다. 시각은 망막을 통해 사물을 보고 뇌가 물체를 보여진다고 인식하여 볼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보여지는 것은 어쩌면 보여 진다는 단어로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눈을 떴을 때 보았던 빛이 그림자처럼 잔상이 남아 그것을 보고 있다고 뇌가 착각한 것뿐이다. 눈을 뜨면 사라질 환상. 하지만 아름답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지독한 굴레를 씌웠어도 사랑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처럼. 단지 깨닫지 못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공연은 끝나지 않았다 . 광대는 눈을 떴다.


"....사랑했구나"


남자의 말에 긍정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 그럼 왜 살아달라고 한 거지?"


남자의 물음을 광대는 다시 되풀이한다. 지독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 의문. 남자의 머릿속에 있던 의문을 소리로 꺼낸 광대는 이번에는-


" 그녀는 "


천천히 가라앉은 그것을 꺼내온다. 깊고 깊은 심연, 얼어붙은 호수 속에서 드러나지 않게 남자가 눈을 감고 호수 속에 빠져 질식하게 만든 감정. 사랑했어. 사랑했다. 그녀는 자신을 그리고-


" 당신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것이 아닐까?"


세상을 더 사랑했을까-


깨닫지 못한 의문. 그리고 깨닫고 싶지 않은 의심.


모든 것을 드러내는 잔혹한 물음이었다.


쩌억-호수가 갈라진다. 거울과 같은 표면은 광대가 던진 공에 갈라져 칼날과 같은 파편을 만들었다. 모든 것이 튀어나온다. 분노. 절망. 아픔. 의심, 부서진 얼음 조각은 남자의 몸을 찌른다. 언제까지 눈을 감을 셈이지? 언제까지 보지 않을 거야? 언제까지 그녀를 사랑할 셈이지? 의심하고 있으면서- 사랑했나? 나보다 더 세계를? 구원자였기 때문에? 정말 나 같은 것을 사랑했나? 하찮은 인간인 나를? 위대한 나비가?


물음들이 휘몰아친다. 감정을 가두었던 얼음의 벽은 이제 칼날이 되어 남자를 덮친다. 어서 눈을 떠 눈을 뜨지 않으면 찔려 죽을 거야. 이렇게 도망치는 것은 소용없어. 이것을 당신을 영원히 따라다닐 테니까. 남자는 말한다. 이대로 죽고 싶어 이대로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영원히 잠들고 싶어. 그래서 그녀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말한다. 요동치는 호수에서 현실에 발을 딛는 황혼은 저물어가는 경계선에서 도망치는 아이를 붙잡는다. 눈을 뜨라고 의심에 물든 푸른 눈동자를 뜨고 잔혹한 현실을 마주 봐서


- 사랑했다면 똑바로 바라봐-


의심의 베일이 쌓여져 있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답니다. 용감한 기사님 그대는 스스로 눈에 씌워진 천을 걷어낼 용기가 있으시나요. 그것을 바라볼 용기가 없다면 당신은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만을 사랑한 것이지요. 편식쟁이. 그렇게 가리면 훌륭한 어른이 되지 못해요 도련님~


-죽음으로써는 도망갈 수 없으니까-


도망가지 말라고. 아름다운 비겁자여-


여전히 잔혹한 얼음의 파면은 몸을 찌른다. 아파 아파 아파. 어디선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한 감각이 떠오른다. 아프고 슬프다. 어째서 그녀의 사랑을 받은 나는- 그녀를 사랑한 나는 왜 아픈 것이지? 남자의 물음에 현실은 답한다―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너는


아니야-멈추어 있는 입술이 달싹인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나는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야. 물고기와 같이 메말라버린 입술이 뻐끔거린다. 잠들기 위해 버린 목소리를 쥐어짜고 막혀오는 절망의 물에 조금씩 분노의 숨을 내며


- 너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야 --------


닥쳐!!!!- 남자는 외쳤다. 어두운 바에 남자의 외침이 울렸다. 터져 나온 숨은 다물어져있던 입술을 통해 머릿속의 음성이 아닌 현실의 음을 덧입고 부서지는 피아노의 건반처럼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하얗게 질려버린 오선지의 악보에 난데없는 음표가 찍힌다. 찍힌 음표는 점점 커져 모든 음들을 집어 삼킨다. 하나의 감정 하나의 생각 하나의-


- 그녀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야-


절망


호수 속에 잠들어 있던 기사는 눈을 뜬다. 잠자는 기사를 깨운 것은 공주의 입맞춤이 아닌 광대의 물음. 저주를 풀면 찾아오는 것은 행복한 결말. 허나 기사에게 찾아온 것은


-살아줘요 카뮤-


마주보고 싶지 않은 현실.


굳어버린 입술을 째고 절규가 숨으로 터져 나왔다, 어디선가 들었던 물음이었다. 아니 들었었다. 분명하게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스스로 던진 물음이었으니까


왜 그녀는 자신이 아닌 세계를 택한 것인가. 나보다 세계를 더 사랑한 것인가 어째서 나를 홀로 두었나. 사랑한다고 하면서-!!!!!


터져 나온 외침은 비명이었다. 태어난 아이가 첫 울음을 터뜨리는 것처럼 자각한 남자의 입술에서 절망이 흘러나왔다. 범람하던 감정에 주체할 수 없는 몸이 겨우 헐떡이며 소리를 죽인다. 멋대로 살아나 터져 나온 감정에 이번에는 육체가 숨이 막혀왔다. 우습게도 죽여 버린 감정이 되살아나 육체를 옭매이며 죽이고 있었다.


하얗게 질려 버린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듯 탁자를 움켜쥐었다. 욱신거리며 무겁게 짓누르는 감각이 손끝에 느껴졌다. 저리고 아픈 감각. 통증이라고 불리는 것. 잊고 있던 것이었다.


"...닥쳐......."


조심스럽게 소리를 내어보았다. 웅얼거리며 희미하던 신음과 같은 소리는 이윽고 점차 명확한 단어가 되어 남자의 입에서 모양을 되찾았다. 그리고-


탁자를 움켜쥐었던 손이 재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듯 치켜진 손안에는 유리잔을 들려 있었다. 부드럽게 비추어주던 조명이 위로 들려진 유리잔의 끝에 위험하게 걸려 반짝거렸다. 오만하게 내려 보는 일 외에는 타인을 본적이 없던 푸른 눈동자는 아래의 존재하여 자신을 올려보는 보라색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같은 행위였지만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달랐다. 분노를 뛰어 넘은 살의. 혼란스러움. 자신에 대한 환멸. 망각하고 싶은 바람. 비어있던 푸른 호수는 감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다. 저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그치게 하고 싶다.


혼탁한 진흙이 물고기의 몸짓에 의해 호수를 더럽히는 것처럼 남자의 감정은 뒤섞여 지금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깨닫게 한 존재를 지우고 싶다. 지워서 자신이 깨달은 진실을 잊고 싶다. 그것뿐이었다. 푸른 물방울들이 넘실댄다. 글라스의 술처럼 생명을 얻고 멋대로 남자를 움직이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들이 멈추었다. 남자의 외침에 대화를 나누던 소리들이 그친다. 현실에 존재하는 소리. 살아있는 자들의 목소리. 평범한 대화. 현실의 공간을 찢은 불멸자 목소리에 살아있는 눈동자들이 남자에게로 꽂혔다. 그리고 그들을 보던 시선은 남자의 손에 들려진 유리잔으로 향했다. 난데없는 소리에 멈추어진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올려보는 보라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만약 단 한마디의 말을 한다면 그것이 시작을 알리는 첫 음이 되어 죽음을 연주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올려진 유리잔의 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갈색의 액체의 움직임에 시선들의 숨도 멈추었다. 과연 그는 던질 것인가.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삶과 죽음. 그 둘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동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에게는 잘 어울렸다. 죄인을 단죄하는 기사와 같이 유리컵을 올린 모습은 위엄이 있었고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던지 그 뜻에 따르겠다고 느낄 만큼.


위협과 같은 동작이었지만 꽂힌 시선들이 무색하게 분노의 대상이 된 이는 태평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호기심에 쌓인 시선들에게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리고 황혼의 눈동자는 그들을 품었다


천천히 입술의 끝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미소였다. 안심시켜주듯 자신의 눈동자를 그들에게 보여주며 그 안의 숨어있는 감정을 드러내주었다. 웃음 속에 감싸인 황혼의 보라색은 사그라지는 태양빛의 아늑함을 떠올리게 하였다. 땅거미가 지는 저녁놀 달려오는 인영. 놀던 어린 자신을 맞이하는 따뜻한 품. 그런 종류의 다정함이었다. 남자의 유리컵에 사로잡힌 시선들이 이제는 황혼의 다정함속에 빠져들었다. 예쁘게 휘어진 눈동자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한다―그는 좋은 남자이니까요


신뢰였다. 남자가 결코 자신에게 던지지 않을 것이라는. 남자가 비웃던 선의였다. 단지 웃는다는 단순한 행위였지만 웃음에 경직된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처음으로. 남자의 감정에 동조하는 듯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남자를 마주보았다.


그 모습을 남자는 마주하였다.


어차피 죽지 않을 것이다. 자신과 같이 불멸의 삶을 사는 존재. 이딴 유리컵으로 불멸의 삶을 끝내지 못한다. 단지 조금 깊은 생채기만 날것이고 그것도 저주와 같은 능력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지. 남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던지지 않았다. 던진다면 왜인지 모르나 슬퍼할 것 같았으니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에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믿고 있다는 신뢰. 사랑받았다고 생각했다. 사랑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깨달아버렸다. 그리고 그래도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을 알아버렸다. 그렇기에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삶을 준 그녀가 단지 감정에 의해 무언가를 죽이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절망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만은 계속 아름다울 것이라고 믿었고 신뢰하고 있을 테니까


- 살아줘요 카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


남자는 팔을 내렸다. 탁-가볍게 탁자를 울리는 소리가 멈추어진 공기를 젖히며 크게 울렸다. 그와 함께 호기심에 가득한 눈초리들은 이윽고 타인에게 무심한 눈동자들로 돌아갔다. 째각-다시 현실의 태엽은 돌아갔다..


혹시 싸움인가 싶어 몸을 긴장시킨 채 그들을 지켜보던 바텐더의 눈동자가 문 앞에 서 자신이 와야 할 상황인가를 묻는 경호원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보내주었다.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기에 이런 소동은 흔하였다. 그렇기에 소리를 지른 결말로 끝난 것은 소동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리를 지른 그와 달리 대화를 나누던 상대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으니까.


- Oui, ce n’est rien, il est seulement soûl. (아, 괜찮아요 좀 취한 것 뿐이에요)-


음률과 같은 단어가 노래처럼 짤막하게 대꾸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자랑은 허튼 말이 아니었는지 불어로 말하는 음성에 바텐더는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위험한 일이 있었지만 괜찮다고 하는 대답을 듣는 순간 이상하리만큼 정말 괜찮을 것이라고 자신은 금세 수긍해버렸다. 하긴 손님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이다. 그 이상의 참견은 바텐더의 역할은 아니었다. 그것이 바의 규칙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던 눈을 거두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태엽이 맞추어 돌아가듯 바의 공간도 다시 사람들의 말소리로 가득하기 시작했다. 낮게 웃고 말을 건네고 조용히 화를 내고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 인간의 소리였다. 바라는 공간의 특성으로 큰 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감정이 있다는 것. 인간이었지만 인간이 아니게 된 자들만이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나비는 희망이지 "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광대였다. 전혀 이어지지 않는 말을 다시 남자에게 던졌다. 희망이란 단어는 남자의 귀에 달라붙었다. 희망 언젠가 들어본 단어였다. 소망이라는 단어로도 불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소망은 죽는 거였다.


이미 끝나버린 삶에 희망이 무슨 소용인 것인가. 그녀는 희망이었다. 뮤즈였고 영감이었으며 남자의 삶의 환희였다. 그 어떤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온전한 아름다움이었다. 남자에게는 희망이 아닌 아름다움. 단지 그뿐이었다. 희망이라면 그것이 사라진 지금은 너무나 비참하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반드시 아름다움이어야 했다.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 그 모습은 매혹적이고 사라질 것 같아 잡아 두고 싶었다. 눈을 사로잡는 날개를 뜯고 만약 날개가 사라지는 것이 슬프다면 온전히 숨을 끊어 붉은 장미가 끊임없이 피어나는 하얀 저택에 두어 박제시키고 싶었다. 그렇다면 덮쳐오는 세월에라도 나비의 아름다움은 영원할 테니까.-허나 사랑했기에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가오는 욕망을 참고 자신의 품안에 걸터앉아 날개를 접고 몸을 기대는 나비를 보며 웃었다. -사랑한다. 나의 나비.


화답하듯 청년의 말에 아름다운 얼굴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직 그만을 위한 웃음. 자신에게만 웃어주는 웃음이었기에 그것으로 만족했다. 자신은 그 웃음에 홀려 진실을 보지 않을 것일까. 그래서 이런 결말에 이르렀는가. 어쩌면 나비가 아닌 거미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불멸의 삶을 내려준 그녀는. 저주와 같은 불멸은 거미줄이 되어 자신을 절망에 얽매였다. 나비의 날개를 떼어버린다면 그 모습은 거미와 같았으니까. 허나 그래도 그녀를 사랑한단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런 저주를 내려준 그녀도 자신이 사랑한 그녀란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에.


"옛날 상자를 받은 여인이 있었지“


질문을 던진 입술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상자. 그래 상자였다. 신들을 배신하고 인간을 사랑한 존재. 그들을 벌하기 위해 신들은 하나를 계획했다. 사랑받는 것에게 배신당하게 하자. 가장 잔인한 것은 그 배신한 이도 스스로 배신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단지 어리 섞음이었다. 아름다움 어리석음. 아름답게 만들어진 존재가 죄인 것인가 아님 그 아름다움에 넘어간 이가 죄인 것인가. 아니면 그 둘 다? 단지 죄인 것인가 다른 것은 없는 걸까? 이야기는- 신화는- 남자의 삶은-?


정말로 슬프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노래는 그치었다. 지금 무대에 존재하는 것은 황혼의 보라색.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 허나 후회하지 않는다. 선택을. 그렇기에 이해할 수 있다. 잔혹한 선택을 한 그녀를.


“ 봄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니까”


이야기를 들려준 입술은 이번에는 자신의 물음의 답을 내어준다. 남자는 알지 못하니까. 수수께끼는 오직 낸 이만이 알고 있을 뿐. 답을 가진 자는 사라졌고 답을 가진 자는 노래할 뿐이었다. 그를 위해.


“ 그녀는 나비였지?”


남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준다. 질문과 이야기. 그리고 알고 있는 사실. 광대의 놀음은 혼란스러웠다. 혼탁하고 위험하고 정신을 빼어 놓는 광대의 몸짓. 공연에 휩쓸려 버린 어리석음. 질문의 형식을 빌어 사실을 말한다. 나비. 그녀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 다른 것은 필요 없는 그녀만의 정체성. 오죽하면 이름조차 파르바네였을까. 하지만 희망이라는 나비와 달리 절망이 되어버린 연인. 어째서 나비는 희망인걸까


질문을 받던 남자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의문이 아닌 질문이 떠올랐다. 절망이 아닌 순수한 질문. 왜 나비는 희망인걸까. 단지 곤충일 뿐이다. 거듭되는 영혼도 부모를 죽게 하는 사신도 아닌 사람들을 현혹시킬 만큼 예쁜 날개를 가진 봄이 되면 나타나는 생물. 생물의 법칙에 따라 겨울잠을 자고 껍질을 벗고 날개를 단 후 날아다는 시기가 봄일 뿐. 그 현상을 보고 멋대로 봄을 불러온다고 착각하며 망상한 것이다. 다른 것은 없었다. 나비로 인해 봄이 오는 것이 아니고 봄을 알려주는 것은 더욱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날아다니는 시기가 봄일 뿐이었다.


“ 나비는 말이야 봄이 되면 돌아와.”


남자의 생각을 비웃듯 과장된 감정을 덧씌운 음성이 즐겁게 다음 말을 이었다.- 아아 정말 피곤한 아이로구만 이렇게 삐뚤어져서야. 낭만을 몰라. 질린 듯 중얼거리는 말과 달리 얼굴은 웃고 있었다. 사랑스럽다는 듯.


다시 묻는다. 이번의 물음은 다정했다


“ 왜 그녀는 세상을 택했을까?"


" 너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언제나 품고 있던 물음이 광대의 목소리를 빌어 현실에 나왔다. 계속 찾고 있던 물음. 허나 결코 존재하지 않는 답. 물음을 낸 이는 사라졌고 답을 알고 있는 소녀는 떠났으니까. 존재하지 않는 답이기에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답을 찾지 못한 자신은 원망하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그녀와 같이. 똑같이 선택한 죽음이지만 다른 선택이었다. 자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은 선택.


세상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만이 있었다면 단 하루의 시간이라도 충분했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진 세상 따윈 필요하지 않았는데 왜 선택했을까.


자신이라면 망설임 없이 택했을 것이다. 세상을 버리고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을.


그녀를 사랑한 자신이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한 그녀는 -


왜 세상을 선택한 것일까?


“그럼 두 번째 질문. 상자 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또 다시 질문이 던져진다.


신은 판도라에게 상자를 주었다.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해주고 자신들을 배신한 이를 벌주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남자의 사랑을 받았고 상자를 열고 싶다는 욕망을 물리치며 기다림 끝에 호기심에 이끌려 세상에 재앙을 불러왔다. 재앙의 상자. 그 속에 마지막으로 존재한 것은-


“ 악과 함께 그것이 들어있었답니다“


이번에는 질문의 답을 말해준다. 세상을 절망에 빠지게 한 상자 안에는 그것이 존재했었다. 영원히 포기하지 못하게 하여 끊임없는 절망에 빠지게 하기 위해 그것을 넣어 두었다고 이야기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금지의 상자를 열고 울고 있는 여인에게 그것은 말했다. 아직 자신이 남아있다고. 닫힌 상자의 뚜껑을 열어달라고. 인간을 절망하게 하기 위해 넣어진 것인지도 모를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말했다. 판도라여 눈물을 거두세요, 아직 내가 남아있답니다. 그러니-


광대는 소리쳤다. 자 이제 피날레 공연의 마지막이랍니다! 빙글 빙글 요란스럽게 휘어진 몸이 무대를 돌아다닌다. 색색의 공들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허공에서 춤을 추다 단 한가지의 공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남겨진 공은 상자로 변해 광대의 손에 들린 채 단 한명의 관객에게 내밀어진다. 광대의 현혹에 푸른 눈은 고정되어 빠져든다. 자 이것에 당신이 원하는 답이 있답니다. 수수께끼는 재미있으셨나요? 백작님-


“ 아직도 모르겠어?“


광대는 웃었다. 여자는 상자를 선물 받았다. 남자는 영원의 생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기다렸다. 여자는 상자를 열고 싶은 마음을, 남자는 죽음을, 모두 위대한 존재에게 선물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기다림의 끝에는 무엇이 존재했을까.


“ 그건- ”


- 절망하지 마세요.


그리고 남자는 손을 뻗어 광대가 내밀은 답을 잡았다. 끼익- 절망 속에 감추어진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 자신을 찾아달란 거잖아“


펑- 축하의 포소리가 들리고 공연의 끝을 알리는 꽃가루가 떨어졌다. 알록 달록 색색의 꽃가루는 마치 눈처럼 무대 위를 휘저으며 남자를 감싸며 춤을 춘다.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답을 찾으셨어요. 그리고 꽃가루들은 남자가 잘 알던 너무나 익숙했던 그것으로 변했다.


햇살에 투명하게 빛난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색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시선을 사로잡는 기적의 눈송이. 보석의 빛남을 가진 사라질 것 같은 허무함의 아름다움. 하지만 지금 떨어지는 이것은-


광대와 남자는 자신들의 위로 떨어지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깃털과 같이 가볍게 살랑거리며 하얀 보석이 내려온다. 남자는 녹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은 녹는다. 따뜻한 인간의 온도에 견디지 못해 사라지는 것이 신기루와 같은 눈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자신에게 오는 눈송이를 외면할 수 없었으니까. 하늘에서 떨어지던 그것이 마침내 남자의 손에 다다랐다. 그리고-


손안에 자리 잡은 하얀색은 녹지 않았다. 눈과 같이 하얗고 보석과 같이 찬란하게 빛나던 그것은 꽃잎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던 것이었다. 소녀가 죽던 날 피어난 꽃이었으니까. 아아 아름답군요 당신의 눈꽃은.


남자는 눈을 들어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빙글거리는 광대의 가면은 이미 벗겨져 있었다. 오직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시켜주는 보라색의 눈동자만이 남아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대는 - 황혼을 걷는 존재는- Elle-는 남자에게 물었다. 공연은 즐거우셨나요?


안개처럼 내려앉은 어둠속에 오렌지빛의 조명이 금색의 머리카락에 부딛쳤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지금 그가 현실에 있다는 것을 자각시켰다.


지금 자신은 바에 있었다.


익숙한 웃음이 광대의 환상에 젖은 푸른 눈동자에 새겨졌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웃음소리가 악동처럼 남자를 반기었다.


“ 아아 역시 남자들이란 한심하다니까"


같이 선물을 받은 이들. 단지 다른 점은 사랑이었다. 선물을 준 이의 마음. 여자는 악의로 가득한 선물이었고 남자는


" 세심한 여자의 마음을 너무 몰라요,~”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유쾌한 현실의 목소리가 놀리듯 웃음을 건냈다. 한심스러운 시선이 이번에는 남자가 아닌 웃는 이의 눈동자에 걸렸다. 허나 사랑스럽다는 감정은 변함이 없었다. 헤메이는 아이가 우는 것을 지나치는 것은 어른이 할 짓이 못 되니까.


남자는 자신의 손에 떨어진 꽃잎을 기억했다. 아름다운 절망.


가장 아름다운 숨이 대지로 떨어졌을 때 생명을 시작을 알리는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망울을 터뜨린 꽃들은 이윽고 하얀 꽃잎들이 날렸다. 그 모습은 남자가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내리던 눈의 보석과도 같았고 꽃잎이 떨어지면 마치 눈이 오는 것 같다고 소녀가 말해주던 꽃과 닮아있었다. 꽃이면서 눈인 꽃잎.


그렇게 눈을 닮은 그것은 봄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언제나 봄은 돌아온다고. 당신의 곁에. 절망이었던 꽃잎은 시작의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 크리스자드 살아있어 줘요. -


세상을 지켰다. 곁에 있기 위해.


" 있을 곳을 지킨 거야. 자신이 돌아올 곳을 말이야."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서


죽음을 대가로 찾아온 세계 그것은 봄이었다. 그리고 봄을 알려주는 나비가 날아올랐다. 아직은 겨울의 숨을 품고 있는 푸른 하늘에게. 봄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 모습이 아름다웠고 또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이었다.


- 찾아줘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


그녀가 돌아올 세계였으니까


" 그녀는 돌아오고 싶었던 거야."


잔혹하다고 생각한 선택은 부탁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연인에게 불멸의 삶을 준 것도 끊임없는 영원의 허무를 가지게 한 것도 고독에 지쳐 감정을 좀 먹어 버려 죽음을 원하게 하는 그런 고통을 겪게 한 것도 -


" 그리고 찾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모두 자신을 찾아 달라는 소녀의 소원이었던 것이다.


기다리고 찾아줘요. 어느 세상 한 곳에 있을 나를


“봄은 돌아와. 그리고 봄이 되면 나비는 나타나지”


아이에게 가르치듯 여전히 황혼의 눈동자는 다정했다. 자연현상이든 신화든 봄이 되면 나비는 나타났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세계의 이치. 소녀는 나비였다. 그리고 나비인 소녀는 세계를 지켰다. 봄을 맞이할 세계는 존재하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환희와 같은 떨림이 남자를 꿰뚫었다. 만날 수 있다. 그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연인을. 만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서? 이미 떠난 세계의 어느 곳에서 그녀가 있을까? 난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그녀를 찾지 못하면 어떻하지? 나는 나는 나는-!!!!


한번 깨어진 감정은 댐의 물처럼 흘러나와 남자를 덮쳤다. 감정의 불협화음. 피아노의 건반이 울린다. 띵동 띵동 띵 띵 띠-잉-!!!!!! 두려움에 쌓인 손가락은 폭풍에 쫒기는 말처럼 흰색과 검은색의 막대 사이를 뛰어 다닌다. 재갈을 벗어버린 감정이 멋대로 요동쳤다. 부서질 듯 날카롭게 울리는 감정이 점차 커져 남자를 지배했다. 너는 그녀를 찾을 수 없을 꺼야. 이미 늦었어. 어리석은 카뮤 기회를 놓쳤구나 언제나처럼.


괴로운 듯 남자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 졌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어떤 것도 해줄 수 없었다. 자신과 달리 영원을 사는 존재에게 인간인 자신이 해줄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허무를 채워 줄 수 없었다. 단지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한 사랑한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큰 절망으로 찾아오는 것은 그녀를 찾을 수 없다는 실망보다는 그녀가 바란 기대를 저버릴지도 모른다는 절망이었다. 자신은 인간이니까. 단지 죽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카뮤란 남자는.


웃는 눈동자가 멈추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무언가에 대한 분노가, 그 다음은 안타까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괴로움이 지나갔다. 가만히 남자를 응시하다 이윽고 한숨과 함께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곧 미안한 듯이 다시 웃는 얼굴을 되찾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잔혹한 일이다..."


꺼져가는 숨처럼 남자는 읊조렸다. 튀어놓은 감정은 번지는 불처럼 멋대로 날뛰다 결국은 회색의 절망을 남기고 사그라들었다


아아, 잔혹하지- 남자의 말에 긍정한 음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잔혹한 결정을 할 정도로 원한 것이지.


" 너는 사랑하고 있어?"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대답했다. 사랑하고 있다. 그 대답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 사랑했으니까"


남자의 대답을 다시 되풀이 한다. 사랑했다. 남자도 소녀도. 사랑은 둘이 하는 것이었다. 어느 한쪽만이 아닌 두 명의 마음의 교류. 서로의 마음이 건네어 질 때 영혼도 같이 섞인다. 그래서 한 몸인 것이다. 둘이 아닌 하나. 피로 연결된 붉은 실. 사랑한다는 마음만을 잊지 않는다면 실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끊어 지지지 않은 실을 따라가면 - 그것을 소녀는 알고 있었던 걸까.


" 그러니까 찾아달라고 한거야"


" 낭만적이네 너의 연인은 "


낮게 깔린 웃음은 희미하게 비추는 바의 조명처럼 부드러웠다. 검은 천장의 매달린 조명은 인공의 빛이었지만 회색의 하늘 속의 달빛과 같아서-


" 내가 알던 녀석은 10년이었어."


웃음은 부드러웠고 그 속에 쌓인 음성은 다정했다. 인간을 사랑한 그것과 같이.


" 찾아 다녔지. 그리고 만났어."


남자는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많은 곳을 돌아다녔어. 교차된 곳도 있었고 같은 곳이지만 다르게 흘러간 곳도 있었지.


" 그 녀석은 나인가?"


남자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라색의 황혼은 응시하다 사라진다.


" 글쎄..."


" 어떤 것을 믿고 싶어?"


대답 대신 질문을 던진다. 이미 그에게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마지막 상자에 있던 것은 가장 약하고 쓸모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연약함이 인간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끈이 되어버렸다. 그것을 인간을 붙잡았고 나비는 믿었다. 반드시 -


탁-가볍게 글라스가 탁자에 얹혀졌다. 이미 비어버린 유리잔은 오렌지색의 빛만이 대신 채워주고 있었다. 술을 비어졌고 더 이상 바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바는 술을 마시기 위한 공간이니까. 이제는 가야할 시간인 것이다.


보라색의 눈동자가 위를 향했다. 매달린 조명은 은은했고 인공의 빛이었지만 회색의 하늘 속에 숨어 있는 달빛과 같아서 지금 자신이 달에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나와 함께 달로 춤을 추러 가볼까요? 인공의 메르헨. 하지만 동화는 언제나 행복한 결말이어야 하는 것이다. 왕자님은 공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난장이는 그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도움을 주는 것이 사명인 것이다. 그것은 광대에게도 마찬가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달빛을 눈동자에 담으며 Elle-는 웃음 지었다.


“기다림의 끝에 존재하는 건 말이야 “


-자신을 찾을 것이라고


“희망이라고”


광대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상자 안에 있던 것은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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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님의 드림주인 파르바네양입니다. 정말 재미있게 썼던 글이었습니다.

허나 정작 파르바네양은 출현하지 않았다는 슬픈 사실이.......;0;

그나저나 짤막하게 쓸려고 마음먹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21p를 넘아가고 있었다....입니다.....

보시면서 들으시면 좋은 음악은 월피스카터의 밀월입니다. 검색해서 들으세요 훗.


ps. 현님 전 기다리고 있답니다 골트 써주신다고 하셨지요. 홍홍홍~*0*

메제탱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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